셰익스피어식 야구

[야구공작소 오연우] 하국상 씨의 단편소설집 ‘야구 냄새가 난다’에는 ‘연극으로서의 야구’라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스포츠로서의 야구가 사라진 미래에 각본에 따라 ‘잘 연출된’ 야구 경기를 펼치는 모습을 그렸다. 물론 실제로 야구가 이렇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재밌는 상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연극 야구’는 아니더라도 야구를 소재로 한 ‘야구 연극’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것도 무려 403년 전 오늘 사망한 셰익스피어와 연결되어 있다.

야구와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와 야구. 아무리 생각해도 접점을 찾기 어렵다. 야구를 소재로 한 시나 소설에 셰익스피어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16~17세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야구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야구와 셰익스피어가 공존할 수 있을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작품이 존재한다. 바로 ‘The Shakespearean Baseball Game(셰익스피어식 야구)’이라는 극본이다.

왼쪽 : 조니 웨인, 오른쪽 : 프랭크 슈스터

셰익스피어식 야구

‘셰익스피어식 야구’는 20세기 중반 토론토에서 활동했던 코미디언 콤비 프랭크 슈스터(Frank Shuster)와 조니 웨인(Johnny Wayne)이 쓴 작품이다. 둘은 하보드 고등학교(Harbord Collegiate Institute)에서 처음 만나 함께 토론토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1941년 토론토 소재의 라디오 방송국인 CFRB에서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했으며, 1990년 웨인이 사망할 때까지 라디오, TV, 연극 무대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여담이지만 한국과의 연결고리도 있다. 생몰연대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6·25 전쟁 시기로, 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에 도쿄에서 한동안 위문 공연을 한 바 있다. 마침 테드 윌리엄스가 복무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극본은 슈스터와 웨인의 1958년 작품으로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스트랫퍼드(Stratford)에서 열리는 셰익스피어 축제의 개막 공연에 올리기 위해 쓰였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고 죽은 영국의 스트랫퍼드와 지명이 같다.

연극은 7분 내외이며 한 야구 경기의 시작과 끝을 묘사하고 있다. 줄거리는 경기 시작 전에 감독이 라인업을 발표하는 부분과 ‘스트랫퍼드 팀’이 0-1로 뒤진 채 9회를 맞이하는 부분으로 나뉜다. 비장한 어투로 쓰인, 비장하기에 코믹한 뒷부분은 1888년에 발표된 유명한 야구 시(詩) ‘타석의 케이시(Casey at bat)’을 연상시킨다.

작품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제목에 걸맞게 셰익스피어로 가득 채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다양한 소재와 명언들을 요소요소에 배치했다. 4대 비극으로 잘 알려진 햄릿, 맥베스가 많이 쓰였고 그 외에도 리처드 3세,율리우스 카이사르,아테네의 타이먼, 실수연발 등이 활용됐다. 이 중 비교적 유명하고 잘 알려진 것들을 중심으로 소개해 본다.

야구장 ‘보즈워스 필드(Bosworth field)’는 장미전쟁의 무대였던 보즈워스 필드에서 따왔다.

기본적으로 야구와 실생활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이는 단어를 많이 활용했다. 예를 들어 Relief는 야구에서는 중간계투를 나타내지만 일반적으로는 완화, 휴식을 뜻한다. 작중에서 감독이 라인업을 발표하며 샌디라는 선수에게 불펜에서 대기하도록 하는데, 이때 “For this relief, much thanks!”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원래 햄릿에서 성의 보초들이 교대할 때 ‘쉬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나 같은 대사를 ‘중간계투 역할을 해 주어서 고맙다’는 의미로 활용했다.

Hit은 야구에서 안타를 뜻하지만 보통은 치다, 때리다로 쓰인다. 작중에서 1점 차로 뒤진 9회 1아웃, 안타성 타구를 심판이 파울로 선언하자 감독은 “안타야 안타! 아주 확실한 안타!(A hit, a hit, a very palpable hit)”라고 항의한다. 햄릿에서 펜싱 경기를 할 때 ‘분명히 맞았다’는 뜻으로 쓰인 대사를 패러디했다.

페어와 파울을 활용한 대사도 있다. 맥베스 1막 3장에서 전투에서 승리한 멕베스는 “이제껏 본 적 없는 나쁘고도 좋은 날이다(So foul and fair a day I have not seen)”라고 말한다. 이는 폭풍우가 쳐서 날씨는 나쁘지만(foul), 전투에서 이긴 것은 좋다(fair)는 뜻이다. 이전에 등장한 마녀들의 대사, “좋은 것은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은 좋은 것이다(Fair is foul, and foul is fair)”와 연결되어 작품 전개의 중요한 장치가 된다.

셰익스피어식 야구에서는 원작의 심오한 뜻은 없애고 “이렇게 페어 같은 파울은 본 적이 없다!(So fair a foul I have not seen!)”로 살짝 바꾸었다. 페어 같은 타구를 심판이 파울로 선언하자 타자가 내뱉는 불평이다.

TV 중계 소식을 전해 듣는 로키

직접 야구와 연결되진 않지만 유명한 대사들도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가 있다. 감독이 오늘 경기는 TV로 중계된다고 말하자 주장인 로키가 “TV, or not TV: that is not the question”라고 답하는 부분이다. To be와 TV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로키는 이외에도 많은 명언(?)을 남긴다. 로키는 경기 전까지 타율 0.208의 부진에 빠져 있었는데 이를 한탄하면서 “저주받은 운명이여, 타격왕이었던 내가, 0.208을 쳐야 한다니(O, cursed fate, that I, who led the league, should bat .208)”라고 말한다. 햄릿이 아버지의 망령을 만난 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대사, “저주받은 운명이여, 내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태어나다니(O cursed spite, That ever I was born to set it right)”가 출처다.

뒤이어 로키는 안타를 기원하며 “안타를 다오, 안타를! 내 왕국이라도 주겠다(A hit, a hit, my kingdom for a hit).”고 외친다. 리처드 3세에서 리처드 3세가 전쟁터에서 말을 찾아다니며 외치는 대사, “말을 다오, 말을! 내 왕국이라도 주겠다(A horse, a horse! My kingdom for a horse)”를 패러디했다.

경기 막바지, 1-0으로 뒤진 9회 말 2아웃에 로키가 타석에 들어선다. 그러나 공은 로키의 머리로 향했다. 공에 머리를 맞은 로키는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Life’s but a walking shadow)”로 시작하는 맥베스의 유명한 독백을 야구 풍으로 바꾸어 읊는다.

맥베스의 독백을 읊는 (다소 정신이 이상해진)로키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가

무대에서 뽐내고 조바심 내다가,

사라지는 것. 인생은

바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분노와 헛소리로 가득찼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맥베스 5막 5장

에디터 = 조예은

극본 감수 = 남육현(유라시아 셰익스피어 극단 대표)

참고 : Deadlock in Korea : Canadians at War, 1950-1953

http://www.canadianshakespeares.ca/a_baseball.cfm

https://teachingshakespeareblog.folger.edu/2010/06/24/baseball-fever-shakespeare-had-it-too/

극본 전문 : http://www.canadianshakespeares.ca/anthology/baseball.pdf

연극 영상 : http://bitly.kr/6YJj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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