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스타, 윌리 맥코비를 떠나보내며

영원히 기억될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44번 윌리 맥코비(출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공식 트위터)

[야구공작소 김동윤] 지난 11월 1일(한국시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전설 윌리 맥코비가 향년 80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우리나라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지 않다. AT&T 파크, 스플래시 히트, 맥코비 만이라는 키워드로 금세 떠올릴 수 있다. 맥코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랑을 받는 선수였다. 비공식적인 별칭이지만, ‘중국 유역’이란 평범한 바닷가에 그의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맥코비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며 각계각층에서 추모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연고를 같이 하는 NBA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감독 스티븐 커부터 시작해 어린 팬을 자처하는 60세의 노인까지 저마다 그와 관련된 추억을 꺼냈다. 이렇듯 맥코비는 샌프란시스코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샌프란시스코가 낳은 최초의 프랜차이즈 스타

1958년 자이언츠 구단은 동부 뉴욕에서 서부 샌프란시스코로 연고지를 옮겼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월드시리즈 5회 우승에 윌리 메이스라는 전국구 스타를 보유한 구단이었다. 그렇기에 새로운 곳에서 정착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팬들이 구단에 좀 더 쉽게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건 맥코비를 비롯한 어린 선수 덕분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들은 지역민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맥코비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올랜도 세페다, 후안 마리샬, 게일로드 페리는 커리어 초반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훗날 명예의 전당까지 입성했다. 이 중에서도 맥코비는 같은 이름을 가진 구단 최고의 선수 메이스와 비교되며 샌프란시스코의 심장이라는 찬사를 받았다.(If Mays was the head for fans, McCovey was the heart.)

메이스와 맥코비는 여러 공통점을 가진 선수였다. 뛰어난 실력, 인종차별이 심했던 1950~70년대에도 스스럼없이 팬들과 어울리는 훌륭한 인성, Willie 라는 이름까지 같았다. 하지만 맥코비가 샌프란시스코의 심장으로 불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죽을 때까지 보여준 샌프란시스코 사랑과 팬들과의 관계였다.

맥코비는 미국 남부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났지만 샌프란시스코와 계약한 뒤 한 번도 샌프란시스코를 떠나지 않았다. 뉴욕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종종 뉴욕을 그리워한 메이스와 달리 맥코비의 집은 언제나 샌프란시스코였다. 잠시 팀을 옮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980년에 은퇴한 후에도 맥코비의 샌프란시스코 구장 나들이는 올해까지 매년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 현지 팬들에게 맥코비만의 특별함을 물어보면 언제나 볼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말한다. 선수 시절부터 은퇴한 후 최근까지도 남녀노소 누구나 그와 대화를 나누고 포옹을 할 수 있었다. 맥코비는 특히 어린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의 집에 놀러 온 아이들은 언제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맥코비는 다가가기 힘든 전설이 아닌 동네 할아버지와 같은 친근한 선수로 팬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었다.

이런 맥코비의 팬 사랑이 단지 일방통행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선수로 뛰는 동안 샌프란시스코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 가장 근접했던 때가 1962년 뉴욕 양키스와 했던 월드시리즈인데, 시리즈 마지막 타자가 맥코비였다. 월드시리즈 7차전 9회말, 0-1로 뒤처진 상황에서 2아웃 주자 2,3루에서 들어선 그는 우측으로 뻗는 타구를 날렸다. 하지만 양키스 2루수 바비 리차드슨의 호수비에 막혔고, 팀은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는 연고지 이전 후 첫 우승을 기대하며 찾아온 홈팬들에게 실망을 줬다며 자책했다. 월드시리즈가 끝난 당일 아무도 모르게 혼자 간 클럽에서 맥코비는 뜻깊은 위로를 받았다. 공연 중이던 밴드가 큰 키의 맥코비를 알아봤고, 의기소침한 그를 위해 즉흥적으로 가사를 바꿔 부른 것이다. 맥코비 당신은 잘 쳤고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고. 그는 그날 받은 위로를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 남은 맥코비의 기록

맥코비가 팬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건 인품 뿐 아니라 실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다. 그는 극심한 투고타저 시대에 타자에게 불리한 캔들스틱 파크를 홈으로 쓰면서 통산 521개의 홈런을 기록한 강타자였다. 은퇴 당시 맥코비가 남긴 기록은 타격 천재들만 모인 메이저리그 1루수 가운데서도 각종 타격 지표에서 상위권을 기록했다. 그런 까닭에 1986년 명예의 전당 입성 자격을 갖춘 첫 해에 바로 이름을 올렸다. 그의 별명이었던 ‘Stretch’ 에서도 알 수 있듯 호쾌하게 뻗는 장타력이 일품인 선수였다. 같은 명예의 전당 멤버 메이스, 세페다와 타선을 이뤘음에도 맥코비의 장타는 투수들에게 견제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맥코비의 고의사구 기록은 단일시즌 45개(배리 본즈 제외 전체 1위), 통산 260개(전체 5위)로 역대 반열에 들어간다.

 

샌프란시스코 시절 윌리 맥코비의 주요 기록

2,256경기 1,974안타 1,113득점 1,388타점 469홈런 24도루

타율 0.274, 출루율 0.377 장타율 0.524, OPS 0.900

NL 신인상(1959), NL MVP(1969), 올스타전 MVP(1969), NL 재기상(1977) 수상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맥코비는 좀 더 특별하다. 샌프란시스코에 입단한 모든 1루수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급급할 만큼 독보적이다. 포지션 전체로 봐도 맥코비를 제칠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 선수는 윌리 메이스, 멜 오트, 배리 본즈 뿐이다.

그는 진정한 샌프란시스코 사나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모든 영광스러운 순간을 샌프란시스코와 함께했다. 1969년의 MVP 시즌과 1977년의 샌프란시스코 복귀 시즌은 그 중에서도 백미다. 1969년엔 본인의 커리어하이인 45홈런, 126타점, 조정OPS 209를 기록하며 팀을 포스트시즌 경쟁 구도로 올렸다. 단일시즌 고의사구 45개의 기록도 이때 달성했다.

그리고 1977년, 신임 구단주 밥 루리는 39살의 맥코비를 복귀시켰다. 그와 메이스가 떠난 뒤 갈팡질팡하는 25~6세의 어린 선수들을 위해 빼든 카드였다. 그가 전년도에 OPS 0.619에 7홈런 36타점밖에 기록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7년 만에 돌아온 샌프란시스코에서 140경기 이상을 출전해 OPS 0.867, 28홈런, 86타점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3년 뒤 맥코비는 42살의 나이로 은퇴했고, 등번호 44번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원히 쓸 수 없는 결번이 됐다.

 

샌프란시스코에 남은 맥코비의 흔적

샌프란시스코 구단은 두 가지 방식으로 맥코비를 기리고 있다. 첫 번째는 서두에 밝혔던 AT&T 파크 우측의 맥코비 만(McCovey Cove)이고, 두 번째는 그 해 가장 팀에 영감을 불어넣은 샌프란시스코 선수에게 주는 윌리 맥 상(Willie Mac Award)이다.

AT&T 파크 우측에 위치한 맥코비 만과 맥코비 동상(출처: 위키피디아 커먼스)

1999년 AT&T 파크가 건립된 후 지역지 기자 마크 퍼디와 레오나드 코펫은 우측 바다를 맥코비 만으로 명명했다. 강한 바닷바람이 부는 AT&T 파크와 돌풍이 잦은 이전 홈구장에서도 많은 홈런을 친 맥코비의 특성을 고려한 작명이었다. 맥코비는 샌프란시스코의 전 홈구장인 캔들스틱 파크에서도 호쾌하게 당겨 치는 스윙으로 우측 담장을 많이 넘겼다. 캔들스틱 파크는 강한 돌풍과 추위로 유명했지만 맥코비의 힘은 이를 압도했다.

 

맥코비 특유의 스윙동작(출처: mlb.com)

캔들스틱 파크의 우측 관중석은 그의 홈런공이 가장 많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 덕에 항상 그 주변은 좌석이 금세 매진되곤 했다. 맥코비 특유의 스윙도 굉장한 인기를 자랑했다. 그 시절 샌프란시스코의 아이들이 곧잘 따라 하는 인기 포즈 중 하나였다.

샌프란시스코 타자가 친 홈런이 맥코비 만에 곧바로 떨어지면 스플래시 히트(Splash Hit)라고 부른다. 2000년대 초반에 본즈가 35개의 스플래시 히트를 기록했는데, 그 공을 잡으려 맥코비 만에 수많은 카약이 몰려 진풍경을 이뤘다. 맥코비 만의 이름도 덩달아 유명세를 탔다.

맥코비의 마지막 시상이 된 2018년 윌리 맥 상, 수상자는 윌 스미스(출처: mlb.com)

윌리 맥 상은 샌프란시스코 선수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상이다. 수상 대상은그 해 가장 팀에 자극을 주고 힘을 불어넣은 선수다. 선수 시절 동료, 구단 직원과 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맥코비가 이 상의 모델이 됐다. 윌리 맥 상은 선수뿐 아니라 구단 모든 직원과 팬이 참여하는 상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이 상은 맥코비가 은퇴한 1980년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총 41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지난 38년 간 매년 맥코비가 직접 시상했지만 이전 더 이상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Forever Giants 윌리 맥코비

60년 만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게 된 윌리 맥코비(출처: Wikipedia)

 

샌프란시스코 지역지의 한 기자는 맥코비를 구전돼오는 마지막 슈퍼스타라고 말했다.(Willie McCovey was baseball’s last word-of-mouth superstar) 영상 자료가 흔치 않던 시절, 선수는 팬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혔다. 독보적인 기록이나 강렬한 이미지가 없는 선수일수록 더했다. 기자는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그도 그렇게 잊힐까 안타까워했다.

맥코비의 활약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벌써 많아졌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뛸 때는 메이스란 큰 산에 가려져 있었고, 동시대엔 쟁쟁한 선수가 많았다. 행크 애런, 로베르토 클레멘테, 미키 맨틀과 같은 수많은 전설이 나왔던 시대였다. 투고타저가 극심했던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던 것도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그가 전성기를 맞았던 1960년대는 한때 리그 전체 ERA 2.98, 평균 타율 0.237을 기록할 정도로 ‘타자 수난시대’였다. 홈구장의 강한 바람도 맞서며 기록한 맥코비의 통산 성적은 다른 슈퍼스타에 비해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자의 걱정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분명 맥코비가 뛰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맥코비의 부고 소식 이후 수많은 팬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추억을 쏟아냈다. 나이 든 팬들은 어린 시절 자신의 학교에 찾아와 무료로 야구를 가르쳐주고, 흑인은 건방지다는 편견을 깨준 다정다감한 청년을 기억했다. 어린 팬들은 불편한 몸에도 행사마다 참석해 구장 엘리베이터에서 하이파이브를 해준 인자한 할아버지를 기억했다.

제각기 사연은 달랐지만 팬들의 글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단어는 친절함과 예의였다. 뛰어난 야구선수였으며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누구와도 함께 했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전설들이 잊혀지는 것을 봐왔다. 샌프란시스코 팬들에게 익숙한, 휠체어를 타고 손을 흔드는 맥코비의 모습 또한 서서히 잊혀질 것이다. 하지만 맥코비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보여준 60년 간의 애정은 망각을 느리게 한다. 누구보다도 샌프란시스코를 사랑했던 남자의 여운은 곳곳에 남아 오랜 시간 팬들의 그리움을 자극하고 있다.

 

윌리 맥코비의 통산 기록

2,588경기 2,211안타 1,229득점 1,555타점 521홈런 26도루

타율 0.270, 출루율 0.374 장타율 0.515, OPS 0.889

NL 신인상(1959), NL MVP(1969), 올스타전 MVP(1969), NL 재기상(1977) 수상

올스타 6회(1963,1966,1968,1969,1970,1971), 1986년 명예의 전당 헌액(1회,81.4%)

 

출처 : baseball-reference.com, fangraphs.com, mlb.com, nbcsports.com

 

에디터=야구공작소 조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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