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공작소 시즌 리뷰] ‘성공일까 실패일까’, 필라델피아 필리스

팬그래프 예상성적: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5위 (64승 98패)
시즌 최종성적: 내셔널리그 동부지구 4위 (71승 91패)

 

프롤로그

[야구공작소 송동욱] 지난 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최하위(63승 99패)를 기록했던 필라델피아는, 최대의 약점이었던 선발진을 보강하기 위해 이번 시즌을 앞두고 많은 힘을 쏟았다. 주전 마무리였던 켄 자일스를 휴스턴으로 보내면서 어린 선발 유망주(빈센트 벨라스케스, 브렛 오버홀처, 마크 어펠)들을 받아왔고, 뒤를 이은 피츠버그와 애리조나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베테랑 찰리 모튼과 2012시즌 신인왕 출신의 제레미 헬릭슨을 영입했다. 그러나 선발진이 이렇게 구색을 갖춰가는 동안에도, 자일스가 빠져나간 계투진이나 선발진 못지않은 약점이었던 타선(2015시즌 fWAR 9.8, 전체 28위)은 별다른 보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오프시즌을 보낸 필라델피아는 전반기 동안 준수한 투수력(fWAR 9.4, 전체 13위)을 바탕으로 42승 48패를 기록하면서 같은 기간 29승 62패를 기록했던 2015 시즌에 비해 확연하게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투타의 동반 붕괴(투타 각각 후반기 fWAR 24, 28위)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지난 시즌(34승 37패)에도 미치지 못하는 29승 43패의 성적으로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뚜렷한 보강 없이 시즌을 맞이한 타선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뤘다. 필라델피아의 타자들이 이번 시즌 동안 적립한 10.9의 fWAR은 리그 전체에서 28위에 해당했고, 82에 그친 팀 wRC+는 아예 리그 최하위였다. 전반기에만 2.4의 fWAR을 기록하며 올스타까지 선정되었던 오두벨 헤레라의 분전도 팀의 부진으로 빛이 바랬다.

자일스의 공백을 전혀 메우지 못한 불펜진의 부진 역시 아쉬웠다. 지난 시즌 중위권 수준의 성적을 기록했던 필라델피아의 불펜은 올 시즌, 평균자책점과 fWAR 모두에서 리그 27위로 곤두박질치며 리그 최악의 불펜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최고의 선수 – 제라드 아이코프

콜 해멀스가 텍사스로 트레이드되었을 당시, 그 대가로 건너온 아이코프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15라운드에서, 무려 전체 474순위로 지명을 받았던 선수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실로 드물었던 것이다.

하지만 올 시즌, 아이코프는 하위 라운드 지명자라는 편견 어린 시선을 극복하며 성공적인 한 해를 보냈다. 이닝, 평균자책점, 탈삼진에서 팀내 1위를 차지했으며, 2번을 제외한 모든 선발 등판 경기에서 5회 이상을 투구했다. 그가 기록한 2.9의 시즌 fWAR은 2004년부터 2015년까지 필라델피아가 1라운드에서 지명한 그 어떤 선수의 통산 fWAR보다도 높은 수치였다. 그야말로 하위 라운드 지명자의 통쾌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닐 수 없다.

아이코프의 이번 시즌은 동시에, 인상적이었던 작년 후반기(3승 3패 평균자책점 2.65)가 단순한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한 시즌이기도 하다. 5월 이래로 월간 승률이 3할 내지 4할 안팎이었던 필리스와는 달리, 아이코프는 시즌 내내 좋은 활약을 이어가면서 앞으로도 좋은 선발투수로 활약할 수 있다는 신뢰를 심어주었다. 그가 9월 이후로 기록한 평균자책점은 심지어 2.52로, 시즌 전체 기록보다도 준수한 성적이었다.

성공의 비결은 바로 좋은 제구력과 커브에 있었다.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여덟 번째로 낮은 9이닝당 볼넷 허용(1.92개)과 전체 6위인 7.2의 구종 가치를 기록한 커브의 조합은 그의 압도적이지 않은 포심 패스트볼(90.9mph)을 효과적으로 보완해주었다.

 

아쉬운 선수 – 애런 놀라, 마이켈 프랑코

미래의 원투펀치로 기대 받았던 놀라와 아이코프 가운데, 시즌 초의 기세가 더 좋았던 쪽은 사실 놀라였다. 하지만 3.2이닝 동안 4실점을 기록하며 시즌 최초로 5회 이전에 마운드를 내려간 6월 11일 워싱턴전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워싱턴전 이후 선발 등판한 7경기에서 놀라는 단 한 차례의 퀄리티 스타트를 만들어냈고, 해당 기간 동안의 평균자책점은 9.82에 달했다. 이전까지 13번의 선발 등판에서 10번의 퀄리티 스타트를 작성하며 2.6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있었던 투수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질 정도의 부진이었다. 몸에 탈이 났던 것인지, 결국 놀라는 7월 28일 애틀란타전 등판을 마친 뒤 팔꿈치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오르며 시즌을 조기에 마감하고 말았다.

필라델피아가 개빈 플로이드 이래로 가장 높은 순번에서 지명했던 선수인 놀라는, 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에이스로 성장해줘야 할 투수이다.* 여전히 나이가 젊고, 이번 시즌의 부진도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비하면 세부적인 성적이 상당히 준수하다는 점에서는 분명 참작의 여지가 있다(ERA 4.78, FIP 3.08). 하지만 그의 부상과 부진이 필라델피아의 이번 시즌에서 가장 아쉬웠던 대목 중 하나였음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 개빈 플로이드: 2001년 1라운드 4픽, 애런 놀라: 2014년 1라운드 7픽.

타선에서는 프랑코의 부진 아닌 부진이 아쉬웠다. 분명, 그가 이번 시즌 기록한 25홈런과 88타점은 올 시즌 300타석 이상 들어선 40명의 3루수들 중 각각 12위, 11위에 해당할 정도로 준수한 기록이었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적에 비해 생산력이 심각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프랑코의 시즌 wRC+는 92로, 평균적인 생산력을 나타내는 100에도 미치지 못한다. 630타석에 나서면서 쌓아 올린 기록의 양이 그럴싸했을 뿐, .255를 기록한 타율부터 6.3%에 그친 타석당 볼넷 비율과 전년보다 줄어든 장타력까지 모든 지표가 실망스러웠다. 올해 초 스프링캠프에서의 대활약으로 한껏 부풀어올랐던 기대 탓에, 그 실망감은 더욱 극적으로 다가왔다.

프랑코는 이번 시즌 양대 수비지표인 DRS(Defensive Run Saved)와 UZR(Ultimate Zone Rating)에서도 각각 -6과 -0.9를 기록하며 500이닝 이상을 소화한 33명의 3루수들 가운데 25위, 21위를 차지했다.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수비로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선수임을 감안하면, 우선 타격에서부터 보다 확실하게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가장 발전한 선수 – 세자르 에르난데스

2015 시즌에도, 2016 시즌에도 필라델피아의 개막전 선발 2루수는 세자르 에르난데스였다. 그러나 그 1년 사이에 에르난데스는 사뭇 다른 선수가 되어 있었다.

2015 시즌의 에르난데스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선수였다. 1.4의 fWAR과 92의 wRC+는 어느 하나 주목할 구석이 없는 성적이었고, 에르난데스는 리빌딩의 과정에서 스쳐가는 그렇고 그런 선수들 가운데 하나로 머무르게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전벽해의 발전을 이뤄낸 이번 시즌, 에르난데스는 팀내 1위이자 작년 시즌의 3배가 넘는 4.4의 fWAR을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2루수 전성시대를 맞은 올해의 메이저리그에서도 전체 2루수 중 9위에 해당하는 좋은 성적이었다.

가장 크게 개선된 부분은 역시 수비력이었다. 지난 시즌까지 평균 이하의 수비 지표를 기록했던 에르난데스는 올 시즌 DRS와 UZR에서 각각 4, 13.5의 플러스 수치를 기록하며 전체 2루수들 가운데 5위, 그리고 1위를 차지했다.

타석에서도 전체적으로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특히 선구안의 발전이 도드라졌다. 에르난데스는 후반기 동안 2루수들 가운데 가장 많은 볼넷(49개)과 두 번째로 높은 출루율(0.413)을 기록하면서 갈수록 출루에 눈을 뜨는 모습을 보였다. 개선된 선구안은 그의 타순을 점차 끌어올렸고, 결국 에르난데스는7월 24일 이후 열린 대부분의 경기를 리드오프로 출전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팀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진 본인에게도, 공수를 겸비한 2루수를 보유하게 된 필라델피아에게도 에르난데스의 2016 시즌은 좋은 기억으로 간직될 것이다.

 

키 포인트 – 필라델피아, 엡스타인의 컵스를 벤치마킹하나

올 시즌 10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시카고 컵스의 단장 테오 엡스타인의 리빌딩 철학은 명확했다. 바로 드래프트는 야수 위주로 지명하고, 투수는 외부 영입을 통해 보강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컵스는 엡스타인 단장 취임 이후 실시한 네 차례의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에 전부 야수를 지명하며 일관된 전략을 드러내고 있다.

그 4년 동안의 드래프트에서 컵스는 팀의 현재이자 미래인 크리스 브라이언트를 지명했고, 그 외에도 카일 슈와버, 알모라 주니어 등의 장차 팀의 기둥으로 자리 잡을 선수들을 선택했다. 벌써부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한 이 야수 유망주들의 활약은 이번 시즌 컵스의 우승에도 적잖이 보탬이 되었다.

필라델피아 구단은 근래 들어 이 엡스타인의 방식을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외야수 미키 모니악을 지명한 이들의 행보는 이같은 추측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필리스는 최근 4년 동안의 신인 드래프트에서 3번에 걸쳐 1라운드에 야수 유망주를 지명해왔다. 이렇게 지명한 야수 중에는 현재 리그 최상위권의 유망주로 평가받고 있는 J.P. 크로포드도 포함되어 있다.

분명 필라델피아의 마이너리그 시스템에도 프랭클린 킬로메, 토마스 에쉘먼처럼 가능성을 지닌 투수 유망주들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의 팜이 점차 야수들을 중심으로 개편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올해 여름의 베이스볼 아메리카 리포트에 의하면, 필라델피아 유망주 상위 10인의 명단에서 7명이 야수이고, 단 3명만이 투수이다. 최근 발표된 베이스볼 프로스펙터스의 리포트 역시 상위 9인의 명단에 단 세 투수의 이름만을 올려놓고 있다.

다음 시즌부터 2009년 이후 처음으로 총 연봉이 1억불 아래로 내려가게 되는 필리스는, 타자 유망주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할 무렵 존 레스터를 영입하며 단숨에 우승권 전력을 완성시켰던 컵스를 본받아 순식간에 컨텐더 팀으로 복귀하려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착실하게 모아둔 유망주로 2008년을 재현할 수 있을까, 아니면 유망주는 결국 유망주일 뿐이라는 격언을 되새기게 될까. 필라델피아의 길었던 리빌딩도 이제 그 끝이 다가오고 있다.

 

마무리 – 굿바이 하워드, 그리고

“Big Piece”라는 별명만큼이나 필라델피아에게 있어 거대한 존재였던 라이언 하워드가 올 시즌을 끝으로 필라델피아를 떠난다. 2012년부터 시작된 5년 1억 2500만 달러의 대형 계약이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2,300만 달러의 팀 옵션이 있지만, 구단은 이를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워드는 이제 1,000만 달러의 바이아웃 금액을 건네받은 채 시장으로 향하게 된다.

하워드의 장기계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한 실패였다. 본격적인 계약이 시작되기도 전에 부상으로 전성기의 기량을 상실한 하워드는 계약기간 내내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고, 실패한 거대 계약을 떠안은 필라델피아는 강제적인 리빌딩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연평균 19홈런 66타점, wRC+ 94).

그럼에도 하워드가 한때 촉망받던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는 사실은, 그리고 필라델피아에 남아 있던 2008 시즌의 마지막 우승 멤버였다는 사실은 그와의 결별을 아쉬우면서도 의미심장한 역사의 한 페이지로 만들어준다. 기나긴 리빌딩의 끝이 보일 즈음 맞이하게 된 마지막 우승 멤버와의 결별. 한 시대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월드시리즈 우승으로부터 8년이 지났을 뿐인데, 필라델피아에는 어느새 새로운 얼굴들뿐이다. 과거와의 마지막 끈을 끊어낸 필라델피아는 어떤 팀으로 자라나게 될까. 다가오는 2017 시즌이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이다.

 

기록 출처: Baseball Reference, Fangraphs, Baseball America, Baseball Prospectus

(일러스트=야구공작소 황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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